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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ilia

모실 자격이 없으니 말씀만 해주십시오

왠지 느낌이 좋은 날이 있다.

운전을 하다 보면 신호에 하나도 걸리지 않고 가는 곳마다 파란불로 바뀌어서 신기한 날이 있고, 생각 없이 라디오를 켰는데 내가 좋아하는 노래가 나와서 기분 좋은 날이 있다. 게다가 그 노래의 가사가 의미심장하기까지 하면 마치 그분의 계시라도 받은 것처럼 좋은 일이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설렘임과 다르게 그날 하루도 다른 날과 다름 없이 똑같을 때가 대부분이다. 

왠지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았지만 아무 일도 없고 그저 내 느낌일 뿐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이렇듯 '느낌'과 '계시'를 구분하기란 참으로 어렵다.

왠지 그분께서 내게 무언가 말씀하시는 것 같기도 한 때가 있지만 그 말씀이 나의 미래를 점쳐주시거나 예고해주시는 것인지 알 길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계시란 표징이 아니라 믿음의 영역이다.

신호등의 파란불이 이어지든, 라디오에서 좋아하는 노래가 나오든 그것이 그분 사랑의 표징은 아닌 것이다.

전에 어떤 징조 같은 것을 보고 바라던 일이나 두려워하던 일이 일어났다고 해서 같은 일이 또 벌어지지는 않는다.

 

언젠가 아주 힘들었던 적이 있었다.
논문을 쓰다 막혀서 도무지 진도가 나가지 않았을 때였는데,
방법을 알려달라고 아무리 울며 기도해도 들어주시지 않았다.
그때 우연히 들은 노래가 Harry Styles의 'Sign of the Times'였다.
Just stop your crying, it's a sign of the times (이제 그만 울어, 이제 시간이 되었다는 것을 보여줄게)로 시작하는데
다음 가사는 더 기가 막혔다.
Welcome to the final show, Hope you're wearing your best clothes
(마지막 장에 온걸 환영해, 그러니 네 옷 중에 가장 좋은 옷을 입어)
나는 이 가사를 보며 논문을 썼는데 마침내 통과되었고 다음 단계를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또 다시 논문을 쓰다 막혀 힘들었던 적이 있었는데 이 노래가 흘러나왔었다. 
나는 그 때를 떠올리며 왠지 잘 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그 노래를 들었다고 논문이 잘 써지지는 않았다.

그분은 표징에 갇혀계신 분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분은 바람처럼 자유로운 분이므로
나의 느낌이나 육감으로 그분의 말씀을 예상할 수 없다.
다만 그분의 자비를 믿고 또 믿으며 희망할 따름이다.

문득 백인대장의 말이 떠오른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

 

그래서 나는 이렇게 기도한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느낌이나 육감 안으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저는 예언자가 아니어서 감히 당신의 뜻을 예측할 수 없습니다.
제가 저의 느낌에 갇혀 당신 말씀을 함부로 예상하지 않게 해 주십시오.
저 혼자 기대하고 저 혼자 실망하다 절망에 빠지지지 않게 해 주십시오.
저 혼자 표징을 기대하고 표징이라 믿는 것을 해석하다 당신을 원망하지 않게 해 주십시오.
다만 어서 말씀해 주십시오. 
당신의 한 마디를 기다립니다.
언제 제게 말씀하실지 저는 알 수 없사오니
표징을 바라지 말고 슬기로운 처녀처럼 깨어 준비하게 해주십시오.
당신께 예고를 강요하지 않고 다만 감사의 그릇을 마련하게 해주십시오.
분명히 한 말씀해주시리라 굳게 믿습니다.
부디 제게서 희망이 사라지지 않게 해 주십시오.
다만 너무 간절히 희망하다 제 느낌을 당신의 말씀이라 혼동하지 않게 해 주십시오.

루카 복음 (7,1-10)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백성에게 들려주시던 말씀들을 모두 마치신 다음, 카파르나움에 들어가셨다.
마침 어떤 백인대장의 노예가 병들어 죽게 되었는데, 그는 주인에게 소중한 사람이었다.
이 백인대장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유다인의 원로들을 그분께 보내어, 와서 자기 노예를 살려 주십사고 청하였다.
이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이렇게 말하며 간곡히 청하였다.
“그는 선생님께서 이 일을 해 주실 만한 사람입니다. 그는 우리 민족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회당도 지어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가셨다.
그런데 백인대장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이르셨을 때, 백인대장이 친구들을 보내어 예수님께 아뢰었다.
“주님, 수고하실 것 없습니다.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주님을 찾아뵙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그저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
사실 저는 상관 밑에 매인 사람입니다만 제 밑으로도 군사들이 있어서, 이 사람에게 가라 하면 가고 저 사람에게 오라 하면 옵니다.
또 제 노예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합니다.”
이 말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에게 감탄하시며, 당신을 따르는 군중에게 돌아서서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심부름 왔던 이들이 집에 돌아가 보니 노예는 이미 건강한 몸이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