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가 왔습니다 (요한 17,1)
무엇이든 때가 있는 법이다.
오는 때가 있는가 하면 가는 때가 있고
좋은 때가 있다면 안좋은 때도 있다.
이러한 '때가 왔다'는 영어로
the hour has come 이다.
즉 우리 말의 '때'는 영어로 'hour'인데,
그리스어, 곧 희랍어로는
ὥρα [호라]라고 한다.
마태복음 8,13에도 이 '호라'가 나온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에게 말씀하셨다. “가거라. 네가 믿은 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시간에 종이 나았다.
여기서 '바로 그 시간에'가 '호라'이다.
그러니까 호라는 절대적 시간, 즉 '지금 몇시야?'할 때의 시간이 아니라
'바로 그 시간', 곧 '믿은 그 시간'을 가리킨다.
적어도 백인대장에게는 종이 나은 시간부터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낫기 이전의 시간과 나은 이후의 시간이 같을 수 없다.
뭐... '오늘부터 1일' 쯤 되는 것이다.
마태복음 10,19에도 '호라'가 나온다.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여기서는 '넘길 때', 즉 넘기는 상황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호라는 절대적 시간이라기보다
다른 상황이 시작되는 때로 볼 수 있다.
지금은 9시 50분이지만
나는 2017년 5월 29일 9시 50분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새롭게 블로그를 시작하며 성경을 묵상하고
새로운 결심을 하게 된 때, 즉 '호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간에의 의미부여'가 잘 드러난 구절이
요한복음 1,39이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보아라.” 하시니, 그들이 함께 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
그분을 처음 만난 제자들은 그 시간을 기억했다.
얼마나 인상적이었으면 '오후 네시'라고 정확히 적어놓았을까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처음 만난 날을
그 날짜만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까지 잊고 싶지 않아 하는 것처럼...
여기서의 시간은 분명 '호라'이다.
그러므로 호라는 마치 '문'과 같다.
시간의 문이라고나 할까
이 시간의 문을 통과하면서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으니까
요한복음 2,4에는 '때'에 관한 유명한 구절이 나온다.
예수님께서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성모님께서 그분께 '포도주가 없구나'라고 했을 때
그분께서 대답하신 것이다.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여기서의 때는 '관문'으로서의 의미를 분명히 알린다.
그럴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상황은 '제대로 할 수 있는 때',
곧 '적절한 호라'이다.
예를 들어 얼른 나가야하는데 전화가 와서 말이 길어지면
'나중에 다시 할께!'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지금은 전화받을 때가 아닌 것이다.
적절하지 않는 호라이므로
제대로된 호라를 사용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분의 '아직'이 중요하다.
이 말씀은 '포도주 못만들어줘!'라는 거절이 아니라
지금은 호라가 아니라는, 제대로된 호라를 사용할 수 없다는 유예이다.
그래서 호라를 알아보는 것이 중요하다
라면 끓일 때 자꾸 열어보면 맛없어진다.
누가 그러더라... 삼겹살은 세 번만 뒤집으라고...
급한 마음에 자꾸 열어보고 자꾸 뒤집는 것은 제대로 먹는 사람의 자세가 아니다
즉 라면의 호라를 모르고 삼겹살의 호라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요한복음 4,21을 더 살펴보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아, 내 말을 믿어라. 너희가 이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닌 곳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예배를 드릴 때'에도 호라가 사용되었다.
여기서의 호라는 시간이 아닌 상황이다.
카나의 혼인잔치처럼 아직 호라가 오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이 '아직'이 '지금'을 견디게 한다.
적절한 호라가 아직 오지 않았으므로 지금의 호라를 참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호라는 거절이 아닌 희망이며 유예이다.
유예에는 이유가 있으니까...
요한복음 5,25에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죽은 이들이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렇게 들은 이들이 살아날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지금이 바로 그 때'라고 하신다.
지금이 바로 그 적절한 호라인 것이다.
행복은 호라, 적절한 호라, 제대로 된 호라를 알아보는 데서 시작된다.
뭐 타이밍이라고 하면 될까...
집에서 출발할 타이밍을 놓지면 기차를 놓친다.
떠날 호라를 알지 못하면 고통이 이어진다.
그러므로 호라를 모르는 것은 집착때문이다.
아직 오지 않은 호라가 결코 오지 않을까봐
지금의 호라를 놓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적절한 호라를 위해서는 지금의 호라를 놓아야 한다
사실 호라는 동시에 두 개일 수 없다
지금은 10시 5분 30초이지만
이 글을 쓰는 순간 38초가 되었으니까
반드시, 호라는 지나간다.
그런데 나의 기억만이 이 호라를 간직하고 놓지 못해 안달한다.
그러므로 새로운 호라, 적절한 호라, 아직의 호라를 알아보는 것이
시간의 호라를 통과하는 비법이다.
즉, '지금이 바로 그 때'라는 것을 알아채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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